대한민국 수출 69조 신화의 균열: 정유 산업을 위협하는 3가지 거대한 파도

밤하늘을 수놓은 별처럼 찬란한 불빛이 가득한 전남 여수 국가산업단지의 야경을 본 적이 있으신가요? 꺼지지 않는 증류탑과 복잡하게 얽힌 파이프라인이 뿜어내는 빛은 지난 60년간 대한민국 경제를 이끌어온 잠들지 않는 심장이었습니다. 놀랍게도, 석유 한 방울 나지 않는 이 땅에서 우리는 세계 5위의 석유 제품 생산 강국이라는 기적을 이뤄냈습니다.

하지만 영원할 것 같던 이 뜨거운 심장이 점차 차갑게 식어가고 있습니다. 한때 국가 수출의 핵심 축을 담당하며 번영을 이끌었던 정유 산업이 전례 없는 위기의 파도에 휩쓸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수십조 원의 수출 신화 뒤에 가려졌던 그림자가 짙어지며, 이제는 산업의 존립 자체를 고민해야 할 중대한 기로에 섰습니다. 이 글에서는 대한민국 정유 산업이 이룬 눈부신 성과와 현재 마주한 거대한 위기의 실체를 3가지 핵심 요인을 통해 심층적으로 분석하고, 미래를 위한 생존 전략을 모색해보고자 합니다.

60년 성공 신화, 대한민국 정유 산업의 빛과 그림자

1964년 첫발을 내디딘 우리나라 정유 산업은 불과 60년 만에 세계가 주목하는 수출 주력 산업으로 성장했습니다. 원유를 전량 수입에 의존하는 불리한 조건 속에서도, 어떻게 이런 놀라운 성공을 거둘 수 있었을까요?

‘규모의 경제’로 이룬 세계 5위의 기적

성공의 핵심 비결은 바로 ‘선제적 대규모 투자’를 통한 규모의 경제 실현이었습니다. 이는 반도체와 자동차 산업에서 증명된 대한민국 제조업의 성공 방정식이기도 합니다. 우리 기업들은 과감한 투자를 통해 세계 최고 수준의 생산 설비를 구축했습니다.

  • 세계 5위의 정제 능력: 우리나라의 하루 원유 정제 능력은 336만 배럴에 달하며, 이는 미국, 중국, 러시아, 인도에 이어 세계 5위에 해당하는 막대한 규모입니다.
  • 세계 최대 규모의 공장들: 단일 공장 기준으로 세계 5위권에 속하는 정유 공장 중 무려 3개가 우리나라 기업의 소유일 정도로 압도적인 생산 능력을 자랑합니다.

이러한 규모의 경제는 생산 효율성을 극대화하고 가격 경쟁력을 높이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또한, 2007년부터 2024년까지 약 34조 원이라는 천문학적인 자금을 투입하여 저렴한 벙커C유나 아스팔트를 휘발유, 경유와 같은 고부가가치 제품으로 전환하는 ‘고도화 시설’을 지속해서 확충했습니다. 그 결과, 2024년 한 해에만 세계 67개국에 석유 제품을 수출하며 503억 달러(약 69조 원)라는 막대한 외화를 벌어들일 수 있었습니다. 이는 같은 해 우리나라 총수출액의 7.4%를 차지하는 놀라운 성과입니다.

낮은 이익률, 끝나지 않는 위기

하지만 화려한 외형 이면에는 어두운 그림자도 존재했습니다. 정유 산업은 대규모 투자에도 불구하고 제조업 평균 영업이익률(6~7%)에 한참 못 미치는 평균 1.6%의 낮은 영업이익률에 시달려 왔습니다. 원유 가격 변동과 글로벌 수요에 따라 수익성이 롤러코스터를 타는 불안정한 구조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미 2012년부터 2014년까지 3년간 약 2조 5천억 원의 적자를 기록하며 한 차례 큰 위기를 겪었습니다. 당시 우리 기업들은 수출 시장을 다변화하고 고도화 시설 투자를 늘리는 동시에, 석유화학 및 배터리와 같은 미래 산업에 진출하며 위기를 극복했습니다. 하지만 2025년 현재,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위기의 쓰나미가 다시 밀려오고 있습니다.

위기의 쓰나미: K-정유 산업을 뒤흔드는 3가지 위협

2022년 10조 원이 넘는 영업이익을 기록했던 정유 4사는 불과 2년여 만에 2025년 상반기에만 1조 5,000억 원이 넘는 합산 영업 손실을 기록하며 적자로 돌아섰습니다. 이는 단순한 경기 순환을 넘어 산업의 구조적 위기를 알리는 강력한 경고등입니다. 대한민국 정유 산업을 위협하는 3가지 거대한 파도는 무엇일까요?

위협 1: 글로벌 공급 과잉과 신흥 강자의 부상

가장 큰 위협은 외부에서 오고 있습니다. 과거 우리의 주요 수출 시장이었던 아시아를 중심으로 경쟁 환경이 급격히 악화되고 있습니다.

중국과 중동의 맹공격: 중국은 자급자족을 넘어 수출 시장까지 넘보며 대규모 설비 증설을 계속하고 있으며, 원유 생산국인 중동 국가들까지 정제 시설을 늘리며 완제품 수출에 뛰어들고 있습니다.

무섭게 성장하는 인도: 특히 인도의 부상은 가장 위협적입니다. 한때 석유 제품 수입국이었던 인도는 2016년부터 순수출 국가로 전환, 2023년에는 우리나라보다 많은 973억 달러를 수출하며 세계적인 강자로 떠올랐습니다. 인도는 단순히 물량만 늘리는 것이 아닙니다.

  • 최첨단 기술력: 인도 릴라이언스 그룹의 잠나가르 정제 단지는 200종 이상의 원유를 처리할 수 있으며, 기술 수준을 나타내는 ‘넬슨 복잡도 지수’가 21.1로 우리나라(7.25~9.8)를 월등히 뛰어넘는 세계 최고 수준입니다.
  • 가격 경쟁력: 국제 제재로 인해 저렴하게 공급받는 러시아산 원유를 대량으로 도입하면서 압도적인 가격 경쟁력까지 확보했습니다.

위협 2: 급증하는 비용과 얼어붙은 수익성

외부 환경이 악화되는 가운데, 내부적으로는 비용 부담이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습니다. 정유사 수익의 핵심 지표인 ‘정제 마진’(석유 제품 가격에서 원유가와 운영비 등을 뺀 이익)이 손익분기점(배럴당 4~5달러)을 크게 밑돌고 있기 때문입니다.

2022년 배럴당 10달러 수준을 유지하던 정제 마진은 2024년 1.4달러, 2025년 1분기에는 0.3달러까지 추락했습니다. 이는 제품을 만들어 팔수록 오히려 손해를 보는 구조라는 의미입니다. 여기에 급등한 전기 요금은 엎친 데 덮친 격이 되었습니다. 정유 업계가 부담하는 연간 전기 요금은 2022년 1조 5,000억 원에서 2024년 2조 1,000억 원으로 2년 만에 6,000억 원이나 급증하며 수익성을 더욱 악화시키고 있습니다.

위협 3: 시대의 전환, 더딘 미래 준비

전기차 전환 가속화와 탄소 중립이라는 시대적 흐름은 장기적으로 석유 제품 수요 감소를 예고하고 있습니다. 우리 정유사들도 이러한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막대한 투자를 계획하고 있습니다.

  • 폐플라스틱을 원유로 되돌리는 화학적 재활용
  • 차세대 항공 연료인 지속가능 항공유(SAF)
  • 수소와 암모니아 등 청정 에너지 사업

하지만 미래를 위한 투자를 뒷받침할 제도적 지원은 턱없이 부족한 실정입니다. 정부는 수도권의 반도체 산업 투자에 대해서는 15~20%의 높은 세액 공제율을 적용하지만, 지방에 기반을 둔 정유 산업의 미래 투자에 대한 공제율은 단 3%에 불과합니다. 이러한 차별적인 지원 정책은 기업들이 미래를 위한 장기적인 투자 결정을 내리기 어렵게 만들고 있으며, 에너지 전환이라는 시대적 과제를 수행할 동력을 잃게 하고 있습니다.

기로에 선 대한민국 정유 산업, 새로운 항로를 찾아서

지금 대한민국 정유 산업이 마주한 위기는 일시적인 불황이 아닌, 글로벌 경쟁 구도와 에너지 패러다임의 근본적인 변화에서 비롯된 구조적 위기입니다. 과거의 성공 방정식만으로는 더 이상 생존을 담보할 수 없는 절체절명의 순간입니다.

이 거대한 파고를 넘기 위해서는 기업과 정부의 전방위적인 노력이 필요합니다. 기업은 과감한 연구개발을 통해 친환경 에너지 및 고부가가치 화학 소재 등 미래 산업으로의 전환을 서둘러야 합니다. 동시에, 정부는 반도체 산업에 버금가는 수준의 세제 지원과 규제 혁파를 통해 기업들이 마음껏 미래에 투자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야 합니다. 산업 경쟁력을 더 이상 개별 기업의 노력에만 맡겨둘 시대는 지났습니다.

지난 60년간 대한민국 경제의 동력이었던 검은 석유가 이제는 지속 가능한 미래를 위한 청정 에너지로 그 모습을 바꿔야 할 때입니다. 위기를 기회로 삼아 새로운 성장 엔진을 장착하고 미래 에너지 시장을 선도하는 것, 이것이 바로 기로에 선 대한민국 정유 산업이 찾아야 할 새로운 항로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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